<차례>
제 4 부 : 맑스주의와 중도주의
1934년 프랑스 사회는 격심한 위기에 직면했다. 일년 전 독일에서는 파시즘이 정권을 장악하더니 이제 프랑스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독일 노동계급의 참담한 패배를 프랑스 노동계급이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행동은 무엇이었을까?
이 문제에 대해 프랑스 공산당과 사회당은 모두 인민전선(People's Front)을 해답으로 내놓았다. 이것은 자유 부르주아 계급과의 동맹에 노동운동을 종속시키는 전략이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자유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이해는 급진당(Radical Party)에 의해 대표되고 있었다. 이 정당과의 동맹을 위해 프랑스 노동계급의 손발을 묶는 것이 공산당과 사회당의 술책이었다.
본 저서는 기회주의 노선인 인민전선에 대한 트로츠키의 답변이다. 이 저서에는 당시 프랑스 정세와 관련된 트로츠키의 주요한 논문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에는 1934년 10월에 저술한 [프랑스는 어디로?]가 있다. 당시 프랑스 공산당은 급진당과의 공식 동맹을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가 1939년 7월에 쓴 논문은 이 저서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이 논문은 제 2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의 발발과 제 3 공화국의 붕괴 직전에 작성되었다.
트로츠키의 논문들은 최근의 국제적 사건들을 보아도 그 유의미성이 입증된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에서는 공산당과 사회당이 인민전선을 수립하여 안토니오 데 스피놀라(Antonio de Spínola) 장군의 연립정권을 지지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좌익동맹이 이 계급협조주의 노선을 채택하여 부르주아 정당들의 지지를 구했다. 좌익동맹의 대통령 후보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은 1974년 선거에서 간발을 차로 패배했다.
그러나 인민전선을 논의의 초점으로 부각시킨 가장 중요한 최근의 사태는 칠레에서 일어났다.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의 인민연합 정부는 1973년 군사 쿠데타로 전복되었다. 이 결과 피노체트(Pinochet) 독재정권에 의한 악랄한 탄압이 자행되어 수많은 좌익인사들과 노동자, 농민이 살육당했다.
러시아를
제외하면 트로츠키가 정세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던 나라는 프랑스였다. 프랑스의
정세는 그의 정치적 지평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는 때때로 프랑스 혁명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트로츠키와 프랑스의 이러한 인연은 이 저서의
중요한 배경을 형성하고 있다.
첫 프랑스 방문
1898년 20세가 채 되기도 전에 트로츠키는 남러시아 노동자동맹을 조직한 혐의로 오데사에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형당했다. 이로부터 4년 반이 지난 후 그는 시베리아를 탈출하여 1902년 가을 영국의 런던에 도착했다. 망명 혁명기관지 [이스크라]의 기고가로서 그리고 이 기관지의 입장을 옹호하는 연사로서 레닌과 함께 일한 그는 여러번 프랑스의 수도 빠리를 방문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당시 러시아 망명자 사회 내에서만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정치생활에 편입될 수도 없었으며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도 없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사회주의운동을 양분하고 있던 정통 맑스주의 조류와 수정주의 조류 사이의 근본 차이를 직접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쟝 조레(Jean Jaurès)가 주도하고 있던 수정주의 조류는 사회당의 밀레랑(Millerand)이 발데크-루쏘(Waldeck-Rousseau)의 내각에 들어가는 것을 찬성했다. 한편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권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의 하나였던 주울 게드(Jules Guesde)는 이 계급협조주의적 경향에 반대하는 맑스주의 조류를 지도하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당시의 경험을 이렇게 적고 있다: “게드가 지도하는 데모대에 끼어서 밀레랑에 대한 온갖 비판성 구호들을 함께 열심히 외쳤다.”([나의 생애])
러시아의
1905년 혁명은 그의 첫 망명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러시아로 돌아가 뻬쩨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으로 혁명의 중심에 있다가 다시 짜르 경찰에 체포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 시기의 트로츠키와 프랑스 좌익
뻬쩨르부르크의 재판, 시베리아 유형 판결, 천신만고 끝의 두번째 탈출, 핀란드와 독일을 경유한 수년간의 오스트리아 체류,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 1914년 11월 프랑스 잠입, 프랑스 정치생활과의 재회 등이 두번째 망명생활의 경로였다. 그는 정치신문 [키에프 사상]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프랑스의 전쟁 통신원이 되었다. 그러나 빠리에 도착하자 그는 멘셰비키 좌파 지도자 율리우스 마르토프(Julius Martov)가 편집인으로 있던 정치신문 [목소리]에도 참여하였다. 이 신문은 곧 [우리 세계]로 개명되었다.
당시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권은 지리멸렬했다. 전쟁 그리고 저명한 지도자들의 투항으로 조직은 파괴되고 구성원들은 침체에 빠져있었다. 주울 게드마저 부르주아 전시 내각에 참여하여 신성동맹(sacred union)이라는 미명하에 프랑스 노동계급을 살육의 전장으로 내몰고 있었다. 프랑스 좌익에게 몰아친 사회애국주의의 거센 파도에 저항했던 혁명가들은 극소수였으며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당시 트로츠키가 접촉하고 있던 그룹 중에는 맑스주의에 가까운 혁명적 조합주의 그룹이 있었다. 이 그룹의 지도자 알프레드 로즈메(Alfred Rosmer)와 삐에르 모나트(Pierre Monatte)는 나중에 공산당 지도자가 되었으며 이후 스탈린주의 노선에 반기를 들었다. 당시 로즈메가 남긴 회상기는 [레온 트로츠키: 그의 인품과 활약상](1969년 패스파인더 출판사)에 포함되어 있는데 당시 트로츠키를 연구하는데 없어서 안될 1차 자료이다.
그의 회상기에 따르면 전쟁 통신원 트로츠키는 전쟁의 파괴에 찢긴 프랑스 전국을 돌면서 전선의 소식을 직접 전했으며 사기가 떨어진 프랑스 병사들을 인터뷰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전쟁을 지지한 제 2 인터내셔널이 혁명적 제 3 인터내셔널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사회애국주의자들에 대항해 결연히 투쟁할 용기와 의지가 없었던 마르토프는 트로츠키 그리고 [우리 세계]과 결별하였다.
1915년 스위스 찌머발트(Zimmerwald)에서는 지리멸렬한 노동운동을 재결집하고자 하는 국제회의가 소집되었다. 트로츠키는 소규모 프랑스 대표단의 일원으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찌머발트 선언”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이 문서는 회의에서 공식 승인되었다. 찌머발트 회의에서 돌아온 후 트로츠키는 노동자 정당들 간에 연락망을 다시 구축하고자 결성된 [국제관계 재개를 위한 빠리 위원회]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암약하던 짜르의 첩자들이 [우리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던 트로츠키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이들은 프랑스의 파시스트들과 연합하여 러시아 병사들이 마르세이유에서 프랑스군 대령한명을 저격한 사건에 트로츠키가 관련되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1916년
초가을 프랑스의 내무장관 루이 말비(Louis Malvy)는 트로츠키를 프랑스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명령서에 서명했다. 스위스가 그의 망명신청을 거부하고 영국이 그의 노르웨이
망명을 막았기 때문에 트로츠키는 스페인으로 추방당했다.
코민테른의 프랑스통이 되다
1917년 2월 혁명 직후 트로츠키는 러시아로 귀환했다. 그리고 곧 볼셰비키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일부 고참 볼셰비키들과 멘셰비키들이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노선에 대항하며 레닌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지도했다.
10월 혁명의 승리 직후 트로츠키는 적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내전을 승리로 이끄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1919년 코민테른이 창립되면서 그는 중요한 외교적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그는 볼셰비키 지도자들 가운데 프랑스 정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따라서 코민테른의 프랑스 지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필요에 따라 지도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노동운동은 크게 고양되었다. 이에 프랑스 사회당 다수파는 1920년 말 뚜르(Tours)에서 개최되었던 당대회에서 코민테른 가입안을 표결로 통과시켰다. 그리고 당명은 프랑스 공산당으로 개명되었다. 그러나 소수파는 여전히 사회당이란 이름으로 정치생명을 유지했다.
그러나 프랑스 공산당은 태생적 한계인 사민주의 경향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코민테른 가입도 이 경향을 근본적으로 극복하지 못했다. 공산당의 가장 계급투쟁적 분파는 이 당을 혁명적으로 탈바꿈시키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으며 코민테른 지도부 특히 트로츠키의 지도력에 의존했다. 이런 배경 하에 트로츠키는 1919년에서 1923년 사이에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의 당면 문제들에 대해 많은 저작을 남겼다. 이 저작의 많은 부분은 [코민테른의 첫 5년](The First Five Years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에 실려있다.
프랑스 제 3 공화국은 기회주의 조류들이 번성할 유리한 조건들을 제공하고 있었다. 공산당 대오 내에서도 개량주의 사회당 및 부르주아 급진당과 의회 내에서 지속적인 합의를 체결하려는 압력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러한 “좌익 동맹(Left Bloc)”에 대해 트로츠키는 노동자 공동전선(workers' united front)을 주창했다.
“‘좌익 동맹’ 즉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일 분파와 동맹하여 부르주아 지배분파에 대항해야 된다는 사고, 이 사고를 노동계급 대오 내에서 분쇄할 수 있는 가장 믿을만한 방법 중의 하나는 노동계급 전체의 동맹을 통해 부르주아 계급 전체에 대항해야 한다 는 사고를 지속적으로 결연히 주창하는 것이다.” ([코민테른의 첫 5년], 뉴욕: 패스파인더 출판사, 1972년, 제 2권, 103-104쪽)
노동자 공동전선의 주창은 프랑스에서 특히 그 의미가 있었다. 보수적 노동조합의 지도자 레옹 주오(Léon Jouhaux)가 노동계급의 분열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노동총연맹(General Confederation of Labor, CGT)으로부터 공산당 주도의 좌파 독립노동조합인 단일노동총연맹(Unitary General Confederation of Labor, CGTU)의 분리를 조장했다. (1936년 이 두 노동조직은 다시 통합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계급의 여론을 압박수단으로 삼고 이 여론 앞에 동요하고 투쟁을 회피하는 개량주의자들의 조치들을 폭로하기 위해”(같은 책, 101쪽) 노동자 공동전선을 주창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공산당은 볼셰비키당이 결코 아니었다. 최고 지도부는 노동자 공동전선을 거부했다. 이때 트로츠키는 다른 문제점들도 같이 지적했다. 사회당에서 그대로 가지고 온 정치신문 [인류](L'Humanité)의 기회주의적 논조, 당기구의 무규율과 우유부단 등이 이것이었다. 사실 당기구의 요직은 사회당 간부들로 대부분 채워진 상태였다.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루이 프로싸르(Louis Frossard)였다. 그는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사회애국주의자였다가 “오해로 인해” 혁명가가 되었다. 그는 공산당 당수가 된 후에도 프리메이슨 회원 자격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정치적 혼란은 이 점으로도 확인될 수 있었다.
프로싸르는 1922년 공산당을 탈당하여 우익세력과 합류하였다. 그러나 [인류]의 편집자 마르쎌 까쉥(Marcel Cachin)과 같은 출세주의자들은 당에 잔류하면서 프랑스 노동자들의 정치의식 상승과 볼셰비키 혁명전통 수용에 장애물이 되었다.
1923년 독일혁명이 실패로 끝나면서 세계혁명의 전망은 흐려졌다. 내전 기간에 소련 인민이 겪은 참담한 궁핍과 고통은 국제 혁명의 실망스러운 결과와 결합되면서 소련 사회를 압박하였다. 그리고 소부르주아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관료집단의 등장을 초래했다. 이 기생적 정치집단은 노동자 국제주의를 저버리고 자신들의 협소한 이익을 구하였다. 정치 권력을 장악한 관료집단의 대표는 스탈린이었다. 그는 “일국사회주의”를 제창했다. 그러나 이 슬로건은 코민테른의 창립 원칙과는 완전히 모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트로츠키는 노동자 국제주의와 노동자 민주주의의 부활을 위해 투쟁하였다.
이 투쟁은 세계혁명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가 대표하는
혁명세력의 투쟁도 소련과 다른 나라에서 스탈린주의가 득세하는 흐름을 역전시킬
수 없었다. 프랑스의 경우 까쉥과 여타 기회주의자들은 스탈린의 보수적 노선에 재빨리
영합했다. 1924년 말 경에는 모나트, 로스메, 수바린(Souvarine) 등 반대파 인사들이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이러한 관료적 보복조치들을 동원하여 스탈린은 프랑스 공산당을
신속하게 자신의 지배 하에 두었다.
좌익반대파와의 연락
트로츠키는 소련 공산당은 물론 코민테른에서도 축출되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한 후부터 그는 스탈린주의의 확산을 저지하는 효과적인 투쟁을 조직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터어키로 추방된 1929년이 되어서야 그는 국제적인 접촉을 재개하고 국제좌익반대파를 조직하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결국 이 작업의 결과 1930년 빠리 회의에서 국제좌익반대파가 결성되었다.
코민테른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을 몰아내고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이 지도적 직위를 차지할 경우 코민테른은 다시 혁명적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좌익반대파는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을 코민테른의 축출된 분파로 간주하고 코민테른의 대체가 아니라 개혁을 위해서 투쟁했다.
프랑스의 경우 좌익반대파는 노동운동 경험이 없는 젊은 활동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로스메 정도만이 널리 알려진 혁명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마저 트로츠키와 견해를 달리 하면서 1930년 투쟁 일선에서 물러나 버렸다. (이들은 1936년에서야 화해를 하고 같이 활동하였다.)
트로츠키는 프랑스 좌익반대파가 직면한 정치적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이를 위해 편지가 오갔으며 활동가들이 터어키의 프린키포섬으로 트로츠키를 찾았다. 이런 방식을 통해 트로츠키는 이들에게 지도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1929년에서 1933년 사이에 그는 프랑스의 조직적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 많은 논문과 편지를 썼다.
그는
1929년 [계급투쟁](Lutte de classes) 그룹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이 그룹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활동을 전개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특히 좌익반대파의 공식 기관지를 창간하는 것 등을 통해 구체적인 정치투쟁을
벌일 것을 촉구했다. 1929년 이 그룹의 기관지 [진실](La Vérité)이
발간되고 1930년 [국제좌익반대파]의 일원으로 [공산주의 동맹](Communist League)이
결성되면서 프랑스 혁명운동은 올바른 길을 나아가게 되었다.
1933년: 세계정세의 변화
1930년대가 시작되었을 때 프랑스는 트로츠키의 정세 전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나라는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온통 독일에 쏠려 있었다. 독일은 경제적 혼란에 휩싸여 있었고 이 와중에 히틀러는 마비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좌익에 대해서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많은 논문들을 통해 파시즘의 정권 장악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경고했다. 이때 독일공산당은 스탈린의 초좌익 노선인 “제 3기” 이론에 갇혀 있었다. 이 결과 파시즘의 위험을 경시하고 반파시즘 투쟁의 중요성을 간과하였다. 스탈린주의 “제 3기” 노선은 이 기간동안 전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승리를 예견하였다. 따라서 당면 정세가 요구하는 투쟁 즉 노동계급의 방어전술과 단결투쟁이 거부되었다.
결국 히틀러는 독일에서 정권을 잡았다. 이 사건은 국제 정세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로부터 1년 이상 코민테른은 이 엄청난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찌 정권이 독일공산당을 물리적으로 괴멸시키고 난 후에도 코민테른은 대재앙을 초래한 “제 3기” 전략을 고수하였다. 이 결과 트로츠키와 국제좌익반대파는 1933년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창립을 촉구하고 이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국제공산주의동맹](International Communist League)을 결성했다.
트로츠키
개인에게도 1933년은 커다란 변화의 해였다. 프랑스 정부가 자신의 망명을 허가했다는
소식을 프린키포섬에서 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급진당 소속 에두아르 달라디에(Edouard
Daladier) 수상이 트로츠키의 국외 추방을 명한 1916년 포고령을 폐기하자 파시스트
조직, 러시아 백군 망명자 조직, 스탈린주의자 등이 1933년 7월 트로츠키의 마르세이유
도착에 맞추어 항의 행동에 돌입했다. 그는 마르세이유에 도착한 후 로양(Royan)
근처의 소읍 쎙빨레(Saint-Palais)에서 잠시 거처를 정하였다. 그리고 이해 11월이
되어서야 그는 빠리에서 몇시간 내에 있는 바비종(Barbizon)에 정착할 수 있었다.
3번째의 프랑스 체류:1933년에서 1935년까지
1934년 2월 6일 프랑스 극우 파시스트 세력과 왕당파 무리들이 격렬한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은 프랑스의 정세를 뒤흔들었다. 의사당에 난입하고 정권을 전복하려던 무장 시위대의 폭력은 경찰의 진압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쿠데타 기도는 무위로 돌아갔지만 애초의 목적을 상당히 달성하였다. 달라디에는 사임했으며 우익 정치인 가스똥 두메르그(Gaston Doumergue)가 2월 7일 수상이 되었다.
프랑스 망명의 허용 조건으로 트로츠키는 처음부터 몇가지 권리를 포기해야만 했다. 익명을 유지할 것과 프랑스 정치에 관여하지 말 것 등이었다. 이를 위해 프랑스 정부는 지방 당국에도 트로츠키의 거처를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4월 그의 신분이 탄로나자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정부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기 위해 우익 언론은 다시 트로츠키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4월 22일자 우익 일간지 [아침](Le Matin)은 “프랑스 혼란의 배후에는 트로츠키가 있다 --- 그는 세계혁명의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라는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파시스트 언론은 매일 그를 공격했다. 공산당 기관지 [인류] 역시 트로츠키를 격렬히 비난하면서 그가 달라디에의 소련 침공을 돕기 위해 프랑스에 왔다고 주장했다. (이때에도 스탈린의 “제 3기” 노선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몇 달이 되지 않아 공산당은 기존 노선을 180도 전환하여 소위 “급진적 파시스트” 달라디에와의 연합을 지지하였다.)
좌익반대파 기관지 [진실]은 트로츠키의 망명권을 옹호하는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탄압은 노동계급 전체에 대한 탄압을 겨냥한 것”이라고 폭로했다. 그러나 두메르그 정권은 이 민주적 권리가 정권 유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트로츠키를 추방하는 명령서가 새로이 입안되었으나 이 명령은 일년 이상 실행될 수 없었다. 그를 받아줄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7개월간 트로츠키와 그의 동반자 나탈리아 세도바는 도망자의 신세였다.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거처를 옮겨야 했다. 이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트로츠키는 프랑스 노동계급이 정치적 위기에 올바로 대응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정세를 면밀히 추적했으며 그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동맹이 가장 효과적으로 정세에 개입하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했다. 특히 사회당 당원들이 위기 상황에서 동요하며 좌선회하고 있는 상황을 파악하고 대중으로부터 고립된 공산주의동맹을 해체하고 사회당에 들어갈 것을 제안했다. 사회당 내부의 혁명적 분자들과 결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 그는 1934년에서 1935년까지 여러 저작들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였다. 1934년 8월 공산주의동맹 전국회의는 그의 제안을 승인했다. 즉 [진실]을 기관지로 하고 조직명을 볼셰비키-레닌주의 그룹으로 정한 후 사회당에 입당할 것을 표결로 통과시켰다. “프랑스 전환”이라고 명명된 이 전술은 국제공산주의동맹의 다른 나라 지부에서도 적용되었다.
7월 트로츠키는 알프스 이제르(Isère)주의 소읍 도메느(Domène)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트로츠키 부부는 프랑스 체류의 나머지 11개월을 은신하였다. 이때 프랑스에는 거대한 정치적 격동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상대적 고립의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익명을 유지하면서도 타인을 통해 정치활동을 계속했다. 당시 그는 도메느의 노동운동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이들을 통해 프랑스 노동운동과 사회당에 개입하였다. 이 사실은 프랑스 역사가 삐에르 브루에(Pierre Broué)의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1934년과 35년의 저작과 관련된 그의 부록을 참조할 것)
본
서의 제 1부에 포함된 “프랑스는 어디로(Whither France?)”는 프랑스 노동운동에
대한 트로츠키의 공헌을 가장 잘 보여주는 중요한 논문이다. 볼셰비키-레닌주의 그룹을
정치적으로 무장시키기 위해 그는 1934년 10월 이 논문을 완성하였다. 이 논문은
특별위원회의 보고서 형식으로 [진실]에 발표되었다. 프랑스 정부에게 탄압의 빌미를
제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저작: 1934년과 1935년
트로츠키는 2월 6일의 사건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이 유발시킨 프랑스 사회의 심대한 위기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이 위기의 직접적인 결과로 가스똥 두메르그가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비록 은퇴한 이 전직 대통령이 극우세력에게 어필하기는 했지만 그의 주요한 정치 기반은 정치권력을 놓고 서로 경합을 벌이고 있는 정당이나 대중운동이 아니라 국가기구와 군부의 관료집단에 있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트로츠키는 그를 보나파르트적(Bonapartist) 인물로 분류했다. 보나파르트적 인물이란 사회가 적대 계급들로 양극화되고 있으나 어느 계급도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계급 역관계가 불안한 균형를 유지할 때 권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등장한다.
그러나 두메르그가 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애쓰는 동안 제 3 공화국은 그의 발 밑에서 붕괴하고 있었다. 위기의 정도가 너무 심각해 생존능력이 있는 보나파르트 체제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 초반 히틀러에 앞서 정권을 잡았던 브뤼닝(Brüning), 폰 파펀(von Papen), 슐라이허(Schleicher) 정권 등과 같이 두메르그 정권은 트로츠키가 명명한 바 노쇠한 보나파르트 체제였다.(그러나 프랑스 파시즘은 급진당의 정치 기반을 잠식하여 소부르주아 계급을 대중적 기반으로 채 확보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 때문에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보다 프랑스 제 3 공화국의 보나파르트 체제가 더 오래 갈 것이라고 트로츠키는 판단했다.)
2월 6일 사건의 또다른 결과는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의 일부가 파시즘의 정권 장악을 체제 유지의 대안으로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이 대안은 독일 파시즘의 승리로 더욱 현실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트로츠키는 2월 6일 직후 발표한 투쟁 촉구문에서 이 사실을 지적했다: “금융자본은 파시스트 도당들을 조직하고 무장시키고 있다. 무쏠리니는 이탈리아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세계적 현상이다. 부패한 야만적 반동이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퍼지고 있다. 프랑스는 다음 차례이다. 2월 6일 사건은 파시스트 도적행위의 첫 번째 리허설이었다.” (1934-35년 저작 238쪽)
그러나 2월 위기는 프랑스 노동계급의 급진화를 가속화시키고 이들을 공식 지도자들보다 더 좌경화시켰다. 사상 유례없는 혁명적 기회와 거대한 책임이 이제 공산주의동맹의 어깨에 놓여있었다.
공산주의동맹은 독일의 거대한 패배가 가르쳐준 교훈을 투쟁의 무기로 삼았다. 당시 독일의 트로츠키주의 조직만이 반파시즘 공동전선 전술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공산주의동맹은 조직의 심대한 왜소성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파시스트 깡패집단들로부터 노동계급을 방어하고 노동계급의 단결을 도모하는 투쟁 전술이 노동운동 내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트로츠키는 “노동자 민병대야말로 파시스트 깡패집단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투쟁의 무기이다. 파시스트들은 조만간 경찰조직의 지원을 받아 노동계급을 물리력으로 제압하려들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같은 책, 243쪽)
공동전선에 대한 트로츠키의 사상은 혁명의 만조기였던 10여년 이전에 그와 레닌이 코민테른을 위해 입안한 정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공산당과 사회당은 공동전설 구호를 왜곡하여 자신들의 관료적 이해에 종속시키려 하였다. 스탈린주의자들은 1934년 7월 “공동전선” 협상을 개시하였다. 즉 사회당 지도부에게 반파시즘 투쟁을 전개할 공동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이 제안서에는 1.시민적 자유의 확대 2.전쟁준비 반대 3.파시스트 집단의 테러행위에 대한 노동계급의 투쟁 조직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혁명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프로그램에는 중요한 단서가 있었다:“공산당과 사회당은 서로에 대한 정치적 공격과 비판을 자제한다.”
이 단서는 기존의 공동전선 정책으로부터 판이하게 빗나간 것이었다. 각기 다른 강령을 가지고 있는 조직들이 특정 행동이나 투쟁을 여전히 지지하기 때문에 공동전선은 가능하다. 이것은 행동의 도구이다. 시민적 자유를 옹호하고 파업을 지지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하여 노동계급을 투쟁의 전선으로 인도하는 그런 투쟁의 도구인 것이다. 계급 갈등이 좀더 격화되는 시기에는 노동자 민병대나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를 건설하기 위해 공동전선 투쟁이 필요하다.
그러나 비판을 금지하는 단서는 반대 효과를 가져올 뿐이다. 이것은 행동의 통일을 저해한다. 왜냐하면 먼저 강령상의 차이가 없다고 선언한 조직이나 개인들만 공동행동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료들의 기회주의적 정책에 대한 혁명적 비판을 봉쇄할 뿐인 단서는 오직 관료들에게만 이익이 된다.
1934년 10월 공산당은 급진당에게 공동전선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이를 통해 계급협조주의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인민전선이 정치 현실로 드러났다. 이 재앙적인 정책은 1935년 7월 공식 출범하였다.
공산당의 이 제안은 급진당이 수락했든 아니든 노동운동에게는 위험한 덫이었다. “적이 아군의 진지를 공격하면서 기동전을 준비하는 동안 진지전 전략을 구사하여 노동계급을 소부르주아 계급에 종속시키는 행위”([진실], 1934년 11월 2일)라고 비판하며 처음부터 볼셰비키-레닌주의 그룹은 인민전선에 대해 투쟁했다.
프랑스 노동계급은 지도부의 쓰디쓴 배신을 이미 여러차례 당한 적이 있었다. 예를 들어 밀레랑은 대중을 배반하고 제 1차 세계대전 중 부르주아 지배계급과 신성동맹을 맺었다. 그렇다면 배신의 경험으로부터 정치적 교훈을 얻은 대중에게 개량주의 지도자들이 인민전선을 선전하고 팔아먹은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소련의 스탈린주의 관료기구는 인민전선의 장점을 선전하였다. 따라서 많은 노동자의 생각 속에 이 정책은 10월 혁명의 권위를 위임받은 것처럼 비춰졌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와 그의 동지들은 인민전선이 러시아 혁명 당시 멘셰비키의 자유부르주아 임시정부 지지 정책의 최신판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했다. 사실 멘셰비키의 당시 노선에 대해서 볼셰비키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대항했었다. 10월 혁명의 절정이었던 무장봉기도 바로 임시정부 지지 정책에 반대해 투쟁한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았다.
마누일스키(Manuilsky)와 같은 코민테른 지도자들은 인민전선이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을 성공적으로 전개할 기회는 1914년 전쟁 전야 때보다 지금이 더 크다. ... 소련에 의존하고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적대관계를 이용할 경우 지금 세계 노동계급은 광범위한 반전 인민전선을 구축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할 것이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제국주의 부르주아 계급은 자국 인민의 실제 이익을 옹호할 능력이 결코 없으며 그럴 의사도 전혀 없다. 이 진실을 우리 맑스주의자들은 항상 주장해왔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지금 이들이 소련의 진정한 이익을 옹호할 능력이 있다고 믿겠는가?”(같은 책, 307쪽)
소련과의 유리한 무역 및 외교 관계를 촉진하기 위해 부르주아 정부를 지지하는 전략은 노동자 국제주의를 붕괴시키고 제국주의를 강화시킬 뿐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은 이 전략의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인민전선이 노동계급의 단결에 소부르주아 계급의 단결을 가미했기 때문에 기존의 공동전선을 개선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 견해에 대해서 트로츠키는 중간계급을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단호한 노동계급의 지도력이 증명될 때 뿐이라고 지적했다. 의회에서 소부르주아 계급을 대표하는 급진당을 지지하는 것은 일종의 자살행위였다. 더욱더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중간계급 내부에 파시즘의 영향력을 확대할 뿐이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이 급진당에 모든 운을 걸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때 소부르주아 계급은 사회적 위기가 의회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선을 이미 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자신의 의회 대표인 급진당을 더 이상 신임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계급이 급진당을 지지할 경우 투쟁 동력이 낭비될 뿐이었다. 노동계급이 무기력증을 보일 경우 소부르주아 계급은 파시스트 깡패들을 지지할 것이었다.
인민전선은 제 3 공화국의 민주주의 전통에 지지를 보낼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런 전통을 방패 삼아 파시스트 깡패들은 무장을 시작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회주의와 파시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소부르주아 계급 대중의 유일한 길이라고 트로츠키는 강조했다.
트로츠키는 그의 저작들에서 프랑스 정세의 새로운 현상들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중요한 강령적 개념들을 포함시켰다. 1934년 6월에 작성된 “프랑스의 행동 프로그램”에 이것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이 프로그램에 포함된 여러 요구들과 제안들은 오직 혁명적 맑스주의 지도부만이 1930년대의 사회적 혼란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보고 있던 사회 계층 즉 여성, 청년, 외국 및 식민지 노동자, 농민, 군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이
프로그램에 제창된 요구들과 제안들은 본 서의 제 2부에 포함된 “다시 한번, 프랑스는
어디로?”에서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강령적 내용들은 다음의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맑스주의적 실천은 이행기적 투쟁 방식(transitional approach)과 분리될 수 없다.
이 방식은 노동계급과 이들의 잠재적 동맹세력들의 시급한 요구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투쟁방식은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과 제 4 인터내셔널] 즉 이행기
강령에 가장 명확히 표현되어 있다. 이 강령은 트로츠키가 작성하고 1938년 9월 제
4 인터내셔널의 창립 회의에서 채택되었다.)
노르웨이에서 멕시코로: 제 3 공화국의 몰락을 주시하다
1935년 6월 트로츠키는 새로 집권한 노르웨이 노동당 정부로부터 입국 허가를 받아 지체없이 프랑스를 떠났다. 동시에 프랑스 사회당 지도부는 총회를 개최하여 인민전선을 승인했다. 그리고 당내에서 세를 확대하고 있는 볼셰비키-레닌주의 그룹이 사회당과 공산당의 인민전선 동맹을 방해할 경우 즉시 출당 처분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그룹이 인민전선 정책에 협조할 의사를 보이지 않자 사회당 지도부는 이 그룹을 1935년 11월 출당 조치해 버렸다. (출당조치와 이것으로 야기된 이 그룹 내부의 분쟁에 대한 트로츠키의 편지들은 [프랑스 지부의 위기, 1935-36]에 실려있다.)
레옹 블룸(Léon Blum)의 인민전선 정부는 노동자 투쟁의 분출기인 1936년 5,6월에 집권하였으나 프랑스 노동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여 실권하였다. 그리고 이 결과 프랑스 지배계급을 위해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땜질하는 기능도 동시에 상실했다. 이러한 정세의 추이를 트로츠키는 노르웨이 망명지에서 면밀히 관찰했다. 이 인민전선 정부의 등장과 몰락의 과정은 본 서의 제 3부에 소개된 트로츠키의 저작들에 잘 분석되어 있다.
1937년 6월 블룸 정부의 붕괴에 이어 급진당은 의회의 주요 정당으로서의 역할을 되찾았다. 블룸이 다시 수상이 되었던 1938년 봄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급진당은 1940년 제 3 공화국이 끝날 때까지 정부의 요직을 장악했다.
그러나 1938년 쯤 이 정당은 자유주의적 인도적 외양을 전부 벗어 던졌다. 사실 급진당 내 좌파의 대표이자 인민전선의 최고 대변인 달라디에는 과거 지지자들의 도움을 구했을 뿐 노동계급은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리고 프랑스 사회의 군사화를 증대시키고 1938년 8월의 스탈린-히틀러 독소(獨蘇)조약 직후 프랑스 공산당을 불법화시켰다.
물가 및 임금과 관련된 포고령을 통해 달라디에는 프랑스 노동자들을 더 큰 이윤과 더 높은 생산성 추구를 위한 산업 농노로 격하시키려 했다. 1938년 11월 30일 총파업의 붕괴는 인민전선이 노동계급의 투쟁의지 마비와 사기저하 만을 초래했음을 자명하게 보여주었다. 이 계급협조적 실험의 유일한 수혜자는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경제적 혼란의 와중에도 이들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현재 지도부로는 자신들의 투쟁이 노동자국가 건설이라는 궁극적 혁명적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프랑스 노동자들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다 떨어져 나간 인민전선이라는 우산 밑에서 자신의 이익을 보호받기 위해서 웅크리고 있는 관료집단에 도전하는 정당은 하나도 없었다.
다른 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미미한 영향력 때문에 사태의 전개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이해 9월 개최된 제 4 인터내셔널 창립회의에서 대중정당의 건설, 혁명 중핵의 양성이 핵심 과제로 명시되었다. 그렇다면 프랑스의 제 4 인터내셔널 지부인 국제주의노동자당(POI)이 혁명적 대중 지도부를 건설할 정도로 강화되고 선전에서 선동으로 노선을 전환할 방안은 무엇이었을까?
1938년 말에서 1939년에 걸쳐 프랑스는 독일과 전쟁에 돌입할 직전에 있었다. 이때 트로츠키는 제 4 인터내셔널이 표방한 핵심적 과업을 해결하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경주했다. 1938년 6월 노동자농민사회당(PSOP)이 결성되었다. 이 조직의 지도부는 중도주의자들이었으나 두 주요 대중정당인 공산당과 사회당의 인민전선 정책과 기회주의를 거부했다. 그리고 이 정당은 국제주의노동자당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주의노동자당의 일부는 대중적 혁명정당 건설의 한 방안으로 노동자농민사회당과의 통합을 제안했다.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트로츠키는 이 제안을 지지했으며 멕시코에서 노동자농민사회당의 지도부가 이 제안을 지지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이 당의 지도부는 통합에 반대했으며 다만 국제주의노동자당 당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입당하는 것을 허용할 용의를 보였다. 결국 국제주의노동자당의 일부는 노동자농민사회당에 들어가 이 당의 강력한 좌파와 결합했다. 그러나 곧 노동자농민사회당 지도부는 국제주의노동자당의 입당을 후회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몇주 전까지 트로츠키는 중도주의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을 편지와 논문들을 통해 펼치게 된다. 이 편지와 논문은 본 서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고 있다. 전쟁이 터지자 노동자농민사회당은 곧 붕괴해 버렸다. 이제 전시 상황이라는 엄혹한 조건 속에서 혁명정당을 건설할 과업은 제 4 인터내셔널의 어깨에 달려있었다.
1940년 독일은 프랑스 전역을 점령하고 비쉬(Vichy)에서 뻬뗑 원수(Marshal Pétain)의 친나찌 보나파르트 정권을 수립시켰다. 독일의 지배와 뻬뗑 독재정권에 대해서 프랑스 노동계급은 무기력으로 일관했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트로츠키는 프랑스에 대한 마지막 미완성 논문 “보나파르트 체제, 파시즘, 전쟁”을 저술했다. 그는 인민전선의 재앙적 해악을 그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프랑스에는
진정한 의미의 파시즘이 존재하지 않는다. 노회한 뻬뗑 정권은 제국주의 쇠퇴기에
등장한 노회한 보나파르트 체제에 불과하다. 1936년 6월 총파업이라는 거대한 투쟁이
분출하면서 노동계급이 급진화되었고 이 격동이 오래 지속되었으나 투쟁은 혁명의
성공으로 귀결되지 못했다. 이 결과 뻬뗑 정권이 탄생했다. 공산당, 사회당에 의한
‘인민전선’ 반동 정치극 등으로 노동계급은 전망을 상실하고 극도의 사기저하에
빠졌다. 인민전선 주창자들은 민주주의와 집단적 안보의 결합을 주창하는 선전공세를
5년간이나 퍼부었다. 이 상황에서 스탈린이 갑자기 히틀러와 동맹을 체결했다. 이
결과 프랑스 노동계급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사태 전개에 넋이 빠져버렸다. 전쟁은
이 혼란을 극단으로 몰고갔으며 수동적 패배주의 아니 좀더 정확히 표현해서 전망상실로
인한 무관심증이 노동계급 가슴 속에 깊숙히 스며들었다. 프랑스의 유례없는 군사적
대패와 가증스러운 뻬뗑 정권의 출현은 그간의 사태 전개에 따른 논리적 귀결이다.”
([1939년-1940년 저작], 417쪽)
인민전선은 1930년대에 프랑스 노동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면서 파시즘과 전쟁을 피할 수 있다는 환상을 유포했다. 대중적 독자행동을 취할 능력을 보유한 사회계급답게 자신의 힘에 의존해야 한다고 교육시키는 대신 동요하는 우익 동맹세력에게 의존할 것을 주문하면서 노동계급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다. 결국 필연적인 실망감을 맛본 노동계급에게 “전망을 상실한 무관심증”이 찾아들었다.
이 시기 트로츠키의 저작들은 불가피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의 지도를 받는 노동계급의 혁명적 공세가 없이는 인류의 의미있는 진보가 불가능하다. 노동자 혁명 정당은 인민전선의 정체를 폭로하고 제 3 공화국을 사회주의 사회로 대체하는 길을 열었을 것이다. 사회의 근본을 뒤흔드는 혁명적 요인들이 모두 존재했으나 결의에 찬 혁명 지도부의 결여가 결국 가장 결정적인 결함이었다.
1930년대 혁명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정세를 명확히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이 목적을 위해 저술된 그의 저작들은 현대 맑스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이론적 결실에 속한다. 본 서는 트로츠키가 1934년부터 1936년까지 저술했던 모든 저작들을 망라하였으며 영어 번역은 잔 라이트(John G. Wright)와 해럴드 아이작스(Harold R. Isaacs)가 맡았다. 본 서의 저작들은 1936년 [프랑스는 어디로?]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판될 예정이었다. 본 서에는 그가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저술한 10개 논문도 포함되어있다.
데이빗 샐너(David Salner)
1977년 6월
제 1부 2월 6일 사건의 영향
1929년에 시작된 세계 경제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은 프랑스 제 3 공화국의 경제를 파괴하면서 경제적 정치적 혼란을 증대시켰다. 예를 들어 1932년 5월에서 1933년 9월까지 수상이 5번이나 바뀌었다.
이 혼란스러운 기간의 첫 수상은 에두아르 에리오(Edouard Herriot)였다. 그는 급진당 당수였으나 갈수록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 뽈-봉꾸르(Paul-Boncour), 달라디에(Daladier), 싸로(Sarraut), 쇼땅(Chautemps)이 뒤를 이었으며 이들도 모두 급진당 소속이었다.
급진당 또는 급진사회당(The Radical or Radical Socialist Party) . 프랑스의 가장 주요한 부르주아 정당으로 “급진적이지도 사회주의적이지도 않았다. 이 정당의 모토는 ‘반동도 안되고 혁명도 안된다!’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전통에 영감을 받았으며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심정적으로는 좌익이면서도 실제로는 우익의 풍요한 생활을 누리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 정당에는 두 분파가 당의 주도권을 다투었다. 우파는 까미유 쇼땅이 좌파는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이끌었다. 이 정당은 농민, 중소사업가, 독립 수공업자의 절대다수를 대표했다. 이들은 프랑스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31년 프랑스 전체 기업의 거의 3분의 2는 노동자를 전혀 고용하지 않았고 3분의 1은 10인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했다. 전체 기업의 0.5%만이 1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을 고용했다.”([인터내셔널의 역사], 율리우스 브론탈 저, 프래거 출판사, 1967년 제 2권 417쪽)
자유주의자 달라디에는 1933년 내내 수상이었으며 1934년 초에 다시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당내 우파의 압력도 점점 증대하고 있었다. 급진당의 정치 기반이었던 소부르주아 계급은 경제 위기로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이 계급의 일부는 의회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고 다른 대안을 찾고 있었다.
극우동맹(The leagues) . 이들 친파시스트, 친왕당파 조직들은 현실에 염증을 느낀 인민이 우경화했기 때문에 세력이 증대되었다. 까지미르 들라로끄(Casimir de la Rocque) 대령에 의해 예비군 단체로 시작된 [불십자가](Croix de Feu)는 회원 수가 70만명이 넘었다. 이외에도 [왕궁](Camelots du Roi), [프랑스 행동](Action Française), [청년 애국자](Jeunes Patriotes), [프랑스 연대](Solidarité Française) 등의 조직도 있었다.
극우세력의 증대에 유리한 정치적 환경을 조성한 또 하나의 요인은 스타비스키(Stavisky) 스캔들이었다. 급진당이 사기꾼 금융인 세르쥬 알렉쌍드르 스타비스키를 보호했다고 극우동맹은 비난을 퍼부었다. 스타비스키의 사망 후 며칠이 지나자 경찰은 그가 자살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우익과 좌익 모두 이 결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의 정치적 친구들을 은폐하기 위해 경찰이 그를 살해했다고 비난했다. 여러 급진당 관료들이 그의 재판을 여러 차례 연기시킨 사실이 드러났다. 1934년 1월 쇼땅 수상의 사임을 불러온 사건이 바로 이 스캔들이었다.
극우세력은 “의회의 도둑놈들”에게 항의하기 위해 1934년 2월 6일 연합시위를 감행할 것을 촉구했다. 신임 수상 달라디에가 강경 반동 경찰총감 쟝 쉬아프(Jean Chiappe)를 경질하자 이들은 시위의 구실을 하나 더 갖게 되었다. 수천명의 무장 우익 군중이 경찰과 충돌하고 국회의사당으로 행진하기 위해서 시위에 참여했다. 이것은 마치 엉성하게 계획된 쿠데타 같았다. 이 시위는 14명 사망 1300명 부상이라는 폭력사태를 불렀는데 결국 달라디에가 수상직을 사임하고 두메르그가 그의 뒤를 잇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은 오스트리아의 돌푸스 정권이 노동운동을 분쇄하고 있던 당시 그리고 히틀러가 독일에서 승리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에 발생했다.
4월 신임 수상 두메르그는 정부부문 고용 노동자의 수를 10% 감축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같은 달 그는 철도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기 위해 철도산업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 조치들은 강력한 국가 행정력을 확립한다는 미명 하에 진행되었으며 전년에 비해 실업률이 25% 급등하는 결과에 일조했다.
좌익(The left) . 프랑스 노동자들은 2월 6일 사건이 불러온 위기의 시급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노동총연맹(CGT)은 2월 12일 총파업을 호소하였고 사회당도 이에 합류했다. 이 총파업 호소에 대해 빠리 지역에서만 백만명이 넘는 노동자가 행동으로 응답했다. 사실 2월 12일 총파업은 전체 노동계급의 실질적 공동전선이었다. 그런데도 공산당은 이 거대한 투쟁을 그 전날 밤이 되어서야 지지했다.
사회당을 진짜 파시스트들보다 더 위험한 “사회 파시스트”로 규정한 채 공산당은 일관되게 공동전선을 거부했었다. (이 뒤틀린 논리의 결과 2월 6일 시위에 공산당 소속 예비군들은 파시스트 예비군들과 함께 참여했다.) 공산당은 최후 순간에 2월 12일 총파업을 지지했으나 이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아니었다. 모리스 토레즈(Maurice Thorez)를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는 평당원들의 단체 행동을 전날 밤에 지지한 것 뿐이었다. 공산당 소속 노동자들은 사회당과 노동총연맹 소속 노동자들과 총파업 대열에 참여했다. 그러나 공산당 지도부의 돌연한 태도 변화는 나중에 이들이 보일 작태를 미리 선보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코민테른은 초좌익 노선을 180도 뒤바꾸고 우익 개량주의 노선을 걷게 된다.
스탈린주의자들의 기형적인 “제 3기” 노선은 다른 요인들과 결합하여 프랑스 공산당의 세력을 급감시켰다. 1921년 뚜르(Tours) 당대회 후 공산당의 당원 수는 사회당 당원 수의 2배였다. 그러나 1932년 이 수치는 크게 역전되었다. 13만7천 대 3만2천으로 사회당의 당원 수는 공산당 당원 수를 크게 앞질렀다.
사회당의 우파 지도자 레옹 블룸(Léon Blum)과 뽈 포레(Paul Fauré)는 세가 증대하고 있는 좌파로부터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좌파의 주요 지도자인 쟝 지롬스키(Jean Zyromsky)와 마르쏘 삐베르(Marceau Pivert)는 트로츠키주의 노선과는 크게 거리를 두었으나 공동전선을 지지하였다.
공산당 내부에서 이 노선을 지지한 유일한 지도자는 자크 도리오(Jacques Doriot)였다. 그는 가장 인기를 누리던 대중 지도자 중 하나였을 뿐 아니라 빠리 노동자 지구 쎙-드니(Saint-Denis)의 시장이었다. 그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도리오는 이 논쟁 때문에 규율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당에서 제명되었다.
1934년 6월 프랑스 공산당은 노선 재주넘기를 감행한다. 도리오를 축출한 이브리(Ivry) 회의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은 사회당에 반파시즘 공동전선을 제안했다. 한달 후에 사회당은 이 제안을 수락했다.
스탈린은 소련의 국제연맹 가입을 원했으며 1934년 9월 가입을 성사시켰다. 제국주의 세력과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예상하고 그는 각국 코민테른 지부들에게 개량주의 정당들과 접촉할 것을 명령했다. 이 조치는 부르주아 정당들의 지지를 구하기 위해 취해진 것이었다.
프랑스는
그가 노선 전환을 실험한 첫 나라였다. 7월 공산당과 사회당 사이에 공동전선이 체결되자
10월 공산당 지도자 토레즈는 부르주아 급진당에게 인민전선 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안했다.
이 팜플렛은 지난 2년 반 동안 쓰여진 여러 논문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1934년 2월 6일 파시스트-보나파르트-왕당파 극우동맹의 등장에서 시작하여 1936년 5-6월의 거대한 대중파업에 이르는 기간에 쓰여진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그간의 정세는 얼마나 변화무쌍했던가! 물론 인민전선 지도자들은 대중의 급진화를 예상하고 정책을 바꾼 자신들의 선견지명을 칭찬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실제 사실과 다르다. 사회당, 공산당, 급진당의 인민전선은 정치 위기의 상황 전개에 있어서 부차적인 요인 밖에 되지 못했다. 이들은 아무 것도 예측하거나 지도해내지 못했다. 거대한 정치적 사건들은 이들의 머리 위에서 폭발했다. 1934년 2월 6일의 예상치 못한 충격은 이들로 하여금 기존의 구호와 사상을 벗어 던지고 서로 연합을 하면서 살길을 모색하도록 만들었다. 1936년 5-6월의 파업 역시 이 의회 연합세력에게 결코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가했다. 표면적으로는 인민전선의 전성기로 보였던 현상이 실제로는 인민전선의 임종을 앞둔 고통에 불과했다.
이 팜플렛에 나오는 글들은 각기 다른 때에 쓰여졌고 프랑스가 겪고 있던 위기의 각 단계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글들이 서로 중복된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중복을 없애는 것은 개개의 글들이 가지고 있는 논리 구조들을 허물고 그 역동적 성격을 거세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중복된 내용들을 그대로 두었다. 이것들이 독자 여러분에게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의 대중 지도자들이 맑스주의를 청산하는 그런 시대를 우리는 경과하고 있다. 가장 조잡한 편견들이 프랑스 노동계급 지도자들의 공식 입장이 되고 있다. 반대로 혁명적 리얼리즘의 목소리는 노동관료들에게 “종파주의”인 것처럼 들리는 모양이다. 따라서 선진노동자들에게 진정한 맑스주의의 기본 원칙들을 다시 또 다시 반복하는 것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이 팜플렛의 내용과 기타 필자의 저작들에서 독자들은 여기 저기에서 모순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 역시 없앨 생각이 없다. 정세의 개개 단계에서 발생하는 똑같은 현상의 각기 다른 측면에 강조를 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크게 보아서 이 팜플렛은 실제 사건들의 검증을 거쳤으므로 이 사건들을 좀더 쉽게 이해하는 일을 도울 것이다.
거대한 파업의 시기는 의심의 여지없이 노동계급 단체들이 풍기는 곰팡내 나는 썩은 공기를 일소시킬 것이다. 그래서 개량주의, 애국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조합주의”의 독기가 제거될 것이다. 확실히 이런 종류의 일은 한꺼번에 저절로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혹한 계급투쟁에 기초한 엄혹하고 끈질긴 사상투쟁의 험한 길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될 위기의 전 과정은 오직 맑스주의만이 사건들의 인과관계를 제때에 분석하며 사건들의 전개과정을 제 때에 예측한다는 사실을 보여줄 것이다.
1934년
2월은 반동세력이 진지하게 연합하여 공세를 취한 최초의 순간이었다. 반면 1936년
5-6월은 노동자 혁명의 첫 번째 강력한 파도였다. 이 두 이정표적 사건들은 우리에게
미리 미래의 두가지 가능한 길을 보여주고 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 아니면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 만이 우리에게 가능할 뿐이다. 현재 블룸 정권은 의회민주주의를 보호한다는
미명 하에 그 존재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 정권은 이 두가지 길 한가운데에서
가루가 되어 흩어질 것이다. 앞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위기의 각 단계들이
어떤 구체적인 모습을 보이든 일시적인 연합과 동맹, 부분적인 공격과 후퇴, 전술적인
에피소드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앞에 파시즘과 노동자 혁명이라는 기로만이
놓여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 팜플렛의 의의이다.
레온 트로츠키
1936년
6월 10일
이
저작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프랑스의 운명을 선진노동자들에게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프랑스는 증권거래소, 은행, 독점기업, 정부, 국가, 교회 등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이것들은 전부 프랑스의 억압기구일 뿐이다. 우리에게 프랑스는 노동계급과
착취받는 농민이다.
1.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붕괴
제 1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그리고 나중에 스페인에서 혁명들이 승승장구하며 일어났다. 그러나 오직 러시아에서만 노동계급은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착취자들의 생산수단을 몰수했으며 노동자국가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러시아 이외의 모든 곳에서는 노동계급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부의 오류 때문에 혁명을 철저히 완수하지 못했다. 이 결과 국가권력은 노동계급의 손에서 벗어나 좌익으로부터 우익으로 이동하더니 결국 파시즘의 손에 장악되고 말았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국가권력이 군사독재자의 수중에 들어갔다. 어느 곳에서도 의회는 계급 갈등을 화해시키고 평화를 확보하는데 실패했다. 결국 갈등은 무력에 의해 해결되었다.
오랫동안 프랑스 인민은 파시즘이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공평히 참정권을 누리는 인민에 의해 모든 문제가 처리되는 공화국에 이들은 살고 있었다. 그러나 1934년 2월 6일 권총, 곤봉, 면도칼 등으로 무장한 수 천명의 파시스트, 왕당파 도당들이 두메르그 정권의 등장을 강요했다. 그리고 이 정권의 보호 아래 파시스트 도당들은 계속 세를 확장하고 무장하고 있다. 그러면 내일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스칸디나비아 제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도 물론 의회, 선거, 민주적 자유, 또는 이것들의 부스러기가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 예를 든 나라들에서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경우와 같은 계급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프랑스는 독일과 다르다”는 말로 자신을 위로하는 자는 전혀 가망이 없다. 자본주의 체제의 쇠퇴라는 똑같은 법칙은 모든 곳에서 작동하고 있다. 생산수단이 소수 자본가들 손에 있는 이상 사회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그리고 이 위기에서 저 위기로 궁핍에서 처참으로 갈수록 나빠질 뿐이다. 각 나라마다 자본주의의 노쇠와 붕괴는 다양한 형태와 독특한 리듬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과정의 기본 특징은 어디에나 똑같다. 부르주아계급은 이 사회를 완전한 파산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인민에게 빵도 평화도 확보해줄 수 없다. 민주 질서를 더 이상 인정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노동자와 농민의 불만은 경찰의 폭력 행사로 해결되지 않는다. 더욱이 인민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의 행진을 강요하는 것도 종종 불가능하다. 먼저 군대는 붕괴하다가 나중에는 많은 병사들이 인민의 편으로 넘어간다. 금융자본이 노동자들과 싸우도록 훈련된 특별 무장대를 조직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치 개들이 사냥감을 쫓기 위해 훈련을 받는 것과 같다. 자본가들이 통치력을 상실해서 민주적 제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노동계급을 분쇄하고 이들의 조직을 파괴하고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데에 파시즘의 역사적 역할이 있다.
파시스트들은
주로 소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인적 자원을 구한다. 이 계급은 대자본에 의해서 완전히
파멸 당했다. 지금 같은 사회 체제는 이 계급에게 해결책을 마련해 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다. 이 계급의 불만, 분노, 절망은 파시즘에 의해 대자본으로 향하지
않고 대신 노동계급에게 향하고 있다. 가장 잔악한 적의 손에 소부르주아 계급이
농락당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파시즘이다. 파시즘을 통해 대자본은 중간계급들을
파멸에 빠뜨리고 절망에 빠진 이들이 노동계급과 대적하도록 부추긴다. 이 살인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부르주아 체제는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 이런 사기극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노동계급의 혁명이 이 체제를 전복하는 순간까지 이 사기행각은
계속될 것이다.
2.프랑스 보나파르트 체제의 시작
프랑스에서 민주주의로부터 파시즘으로의 전환은 그 첫 단계를 지나고 있을 뿐이다. 의회는 존재하지만 기존의 위세를 상실했으며 이것을 다시 회복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2월 6일 사건 이후 완전히 겁에 질린 의회 다수파는 두메르그를 구원자, 해결사로 생각하고 그에게 국가권력을 넘겼다. 이 결과 두메르그 정권은 의회 위에 군림하고 있다. 이 정권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다수파가 아니라 관료집단, 경찰, 군대 등에 직접 의존하고 있다. 두메르그가 공무원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국영 부문 노동자들에게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고분하고 규율에 복종하는 관료기구를 필요로 한다. 이 토대 위에서만 그는 실각할 위험이 없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파시즘 세력과 기타 극우 떨거지들이 모인 “공통 전선(common front)”에 대해 공포를 가지고 있는 의회 다수파는 두메르그 앞에 머리를 조아릴 수 밖에 없다.
임박한 헌정 질서 “개혁”, 의회 해산권 등에 대해서 지금 많은 글들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런 모든 문제들은 법적인 흥미 밖에 없다. 정치적 의미에서는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베르사이유궁의 정부를 거치지도 않고 개혁은 성취되었다. 무장한 파시스트 도당들의 등장으로 금융자본은 의회 위에 군림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프랑스 헌정 질서의 핵심이 있다. 이외의 모든 것은 환상, 말장난, 의식적인 기만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두메르그의 역할은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 뻬뗑 원수(Marshal Pétain)나 따르뒤(Tardieu) 같은 인물이 그의 뒤를 잇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나폴레옹 1세나 3세가 했던 역할과 유사할 뿐이다. 보나파르트 체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두 적대 진영의 분쟁을 토대로 관료적-군사적 독재 체제를 구축하여 “나라”를 “구원한다”. 나폴레옹 1세는 부르주아 계급의 격정적인 청년기에 보나파르트 체제를 대표했다. 나폴레옹 3세의 보나파르트 체제는 부르주아 계급이 나이를 먹어 약간 머리가 벗겨질 때 등장했다. 자본주의의 쇠퇴기에 등장한 노쇠한 보나파르트 체제의 인격화가 곧 두메르그이다.
의회 체제가 보나파르트 체제로 첫 발을 내디딜 때 두메르그 정권이 등장했다. 권력을 지탱하기 위해 그는 오른쪽에 그를 권좌로 밀어 올린 파시스트 및 극우 도당들을 필요로 한다. [청년 애국자], [불 십자가], [왕의 궁전] 등 극우조직들을 서류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해산시키라고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가 몸을 지탱하기 위해 붙잡고 있는 나무를 자르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물론 정권이 좌로 또는 우로 일시적으로 동요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래서 때 이른 파시스트 공세는 정부 상층의 “좌”경화를 촉발할 수 있다. 정권은 일시적으로 두메르그의 손에서 따르뒤가 아니라 에리오의 손으로 넘어갈 수는 있다. 그러나 우선 어느 누구도 파시스트 도당들이 때 이른 쿠데타를 감행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둘째로 정권의 상층이 일시적으로 좌로 선회한다 할지라도 사태의 일반적 경로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다만 양대 계급 사이의 최후 결전이 잠시 미뤄질 수 있을 뿐이다.
평온한
민주주의 체제로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태는 불가피하게 노동계급과 파시즘
간의 충돌을 불러올 것이다.
3.보나파르트 체제는 오래 버틸것인가?
지금의 이행기적 보나파르트 체제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결정적인 전투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노동계급에게 얼마나 남아있을까? 당연히 답을 정확히 얘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세가 전개되는 속도를 가늠하기 위해 몇몇 요인들이 분석될 수는 있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무어니 해도 가까운 미래에 급진당이 겪게될 운명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지금 보나파르트 정권의 등장 자체가 노동계급과 파시즘 사이의 내전이 시작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보나파르트 정권은 경찰과 군대를 자신의 주요한 물적 토대로 삼고 있다. 그러나 또한 왼쪽 세력 즉 급진당의 지지도 얻고 있다. 대중 정당인 급진당의 정치 기반은 도시와 농촌의 소부르주아 계급이다. 이 정당의 지도부는 도시와 농촌 대부르주아 계급의 “민주적” 하수인들로 채워져 있다. 이들은 인민에게 조그만 개량들과 민주적 미사여구들을 간간이 선사하면서 말로만 반동세력과 교회의 위협으로부터 인민을 일상적으로 보호해왔다. 그러나 모든 중요한 문제들에 있어서 이들은 대부르주아 계급을 위한 정책만을 시행해 왔다.
파시즘 그리고 특히 노동계급의 위협에 직면하자 급진당은 의회 “민주주의” 진영에서 보나파르트 진영으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낙타가 기수의 채찍을 맞고 무릎을 꿇는 것과 같이 급진당은 네 무릎을 꿇고 자본주의 반동세력이 자신의 등에 올라타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급진당의 정치적 지지가 없을 경우 두메르그 정권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프랑스를 독일과 비교한다면 두메르그 정권과 이후 등장할 가능성이 있는 후계 정권은 브뤼닝, 폰 파펀, 슐라이허 정권과 일치할 것이다. 이 독일의 정권들은 바이마르 공화정과 히틀러 독재 사이에 존재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기는 한다. 독일의 보나파르트 체제는 민주적 정당들이 붕괴하고 나찌당이 엄청난 속도로 세를 불리고 있을 때 등장했다. 독일의 세 보나파르트 정권들은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다. 따라서 자기 발 아래에 절벽을 보면서 노동계급과 파시즘이 걸어 놓은 줄 위에서 곡예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세 정권들은 모두 재빨리 사라졌다. 한편 노동계급 진영은 올바른 투쟁을 하기에는 분열되어 있었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지도부의 연막술, 사기극, 배신극에 농락당했다. 그래서 파시스트 나찌당은 전투 한번 치르지 않고 승리하여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프랑스 파시즘은 아직도 대중적 위세를 얻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보나파르트
체제는 확실하거나 안정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급진당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이 두 사실 사이에는 내적인 연관이 존재한다. 정치적 기반의 사회적 성격으로
보면 급진당은 소부르주아 정당이다. 파시즘은 소부르주아 계급을 정복해야만 대중적
위세를 누릴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파시즘은
급진당을 희생시켜야 대중적 위세를 확보할 수 있다. 이미
이 과정은 진행 중이다. 다만 초기 단계에 있을 뿐이다.
4.급진당의 역할
지난번 지방 선거에서는 예상했던 결과가 나왔다. 파시즘과 노동계